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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제

by lobbylobby 2023. 4. 26.

창작과제 

창작과제

 

 

 

바람이 너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많이 분다 하루종일 눈송이가 커졌다. 가 작아졌다. 가를 반복한다. 당장 이틀 후가 시험인데 나는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지도의 저 끝까지 떠났다가 돌아온다. 떠났다 돌아오니 코트 속에는 바닷바람의 냄새가 남아있다. 눈이 녹아 축축해진 코트 깃을 바로 잡으면서 그립지만 곁에 두지 못한 그 많은 것들을 이 바람처럼 옷깃에 묻히고서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본다 문학 나에겐 문학에 대한 치기 어린 열정 따윈 없었다. 가슴 설레는 문학 작품 때문에 잠 못 이뤄본 적이 없었고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우느라 수줍었던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국문학과 여학생이라면 으레 한번쯤 겪어봤을 만한 문학소녀의 시절이 나에게는 없었다. 내가 단 한번도 노트에 소설이나 시 따위를 끄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문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글쓰기의 가까이에 가면 평생을 가난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일찌감치 나를 깨웠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국어 아닌 수학에 열중했고 문과 아닌 이과를 선택했고 국문학과가 아닌 다른 과를 선택했었다. 어머니엄마는 종종 나를 믿는 도끼에 비유하셨다 수능시험을 사흘 앞두고 좋아하는 가수의 콘써트에 다녀오던 날에도 엄마는 믿는 도끼는 발등을 찍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며 그냥 넘어가곤 하셨다 엄마는 대체로 모든 걸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셨지만 그것은 믿는 도끼로서의 역할을 내가 계속 해낼 때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사실 내가 엄마로부터 한번도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믿는 도끼의 역할 때문이었다. 위로 둘 있던 언니는 자라면서 늘 말썽을 부렸고 엄마는 가파른 오르막길 위에 있던 두 언니의 학교를 찾아다니느라 늘 무릎이 아팠다 셋 중에서 하필 내가 믿는 도끼가 되어야 했던 것은 걔 중에서 내가 성적이 제일 낫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언니가 말썽을 부릴수록 엄마는 나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주었고 어릴 때부터 엄마 무릎을 떠나기 싫어했던 나는 그 신뢰에 답하고 싶어서 언제나 애가 탔다 엄마는 정작 본인은 한번도 책을 놓지 않고 사셨던 분이시면서 막내딸이 책 속에 파묻혀 사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셨다 원고지를 곁에 끼고 사는 삶을 엄마는 내 삶으로 생각지 않으셨다 나는 우리 엄마가 다른 엄마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엄마 역시 친구들 앞에서 자식자랑을 하고 싶은 평범한 엄마였고 엄마는 그 중에서도 내 딸이 의사라는 자랑을 원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3년 내내 물리와 화학에 정을 붙이고 산 건 순전히 그런 엄마의 소망 때문이었다. 1998년그렇지만 나는 엄마의 소망을 이뤄드리지 못했다. 꽤 오랫동안 착한 딸의 역할을 해왔지만 사실 학교에서의 나는 두 언니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말썽 많은 애였고 걱정을 끼치지 않을 만큼의 성적을 유지한다. 해도 공부에 열중하는 모범생은 되지 못했다. 꿈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나는 다시 노력하고 싶진 않았고 엄마의 꿈을 지켜주지 못한 대신 엄마 곁을 떠나왔다 그것이 나를 처음으로 엄마의 무릎 밑을 벗어나게 한 1998년이었다. 사람의 일생에는 저마다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아마 그 순간이 1998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때로는 1998년 이전의 내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너무 많이 변해버렸고 마치 심장을 끄집어 내 다른 심장과 바꿔치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게 달라졌다. 늘 사람 욕심이 많았는데 사람이 귀찮아졌고 늘 사는 게 치열했는데 모든 게 심드렁해졌고 늘 성공하고 싶었는데 이루고 싶은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1998년 이후 그 어느 날 그토록 무덤덤했던 문학이 처음으로 간절해졌다. 서울서울에는 바다가 없었다. 바닷가의 비린 내음을 맡고 자란 나는 그것이 너무 낯설었다.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의 물결 따위로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서울에 오고 싶었으면서 나는 막상 서울이 가진 상실감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 그 상실감을 못 이겨서 자주 책 속으로 도망쳤고 편지를 쓰다가 일기를 쓰다가 그것들을 쓰기 위해 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어딘가를 향해 펜을 들었다. 나를 글쓰기 앞에 가져다 놓은 것은 서울이라는 이 도시였다. 국어 국문학예전에 배우던 것을 버리고 국문학을 택했던 것은 이것 이외의 무엇도 잘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썩 잘해낼 수 없지만 이것 이외의 다른 것은 조금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엔 문학 가까이로 온 나에게서 아버지는 등을 보이셨지만 나는 내가 국어 국문학과 학생이라고 말할 때의 그 순간이 좋았다. 책장에 나란히 꽂혀있는 문학통사와 문법론의 책들을 보는 것이 좋았고 지나간 세대의 소설을 찾느라 서점 안을 뒤지는 그 순간이 좋았다. 국어 국문과 학생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의 미묘한 자부심이 좋았다. 그리고 또 나를 가르쳐 주신 교수님이 좋았다. 언제나 그 수업에 열중하게 만들어 주셨던 한 분의 교수님의 좋았고 그저 그냥 좋기만 해서 분명히 조금쯤은 지겨운 그 수업시간에 앞자리를 골라 앉게 만들었던 또 한 분의 교수님이 좋았고 그리고 내가 만약 존경이라는 단어를 안다면 그 분 앞에서 그 단어를 발음하고 싶게 했던 다른 한 분의 교수님이 좋았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지만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것들이 좋았고 많은 것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할 수는 있었다. 국어 국문학의 자리로 온 것이 이상하리 만큼 한번도 후회가 되지 않았다. 졸업문득 같은 교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사람들과 나는 무슨 인연이 있었기에 이렇게 몇 년을 한 강의실에서 숨을 쉬고도 단 몇 마디 말도 나눠보지 못한 채로 헤어지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 뿔뿔이 흩어질 테고 다시는 같은 강의실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일이 없을 테고 어쩌면 평생을 같은 거리에서 지나치는 우연 따위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이 사람들과 나는 몇 년을 한 강의실에 앉아있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정 들이고 지낸 이가 없어서 나에게 졸업은 이별이라는 느낌은 없다 대학에서 나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그리워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호수를 둘러싸고 피어나던 벚꽃잎이고 바람에 떨어져 내리면 온 거리를 꼭꼭 채우던 은행잎이고 동산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개나리와 진달래이다. 그렇지만 또 가끔은 하릴없이 떠오르는 얼굴과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얼굴들에 한번도 가까이 다가서 본 적 없었고 그런데도 매일매일을 마주친 얼굴들이니 이 사람들과 나는 무슨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답이 없지만 물음만 떠올랐던 생각글쓰기누군가는 글쓰기에 모든 걸 걸 수 있다. 고도 했고 누군가는 평생 글쓰기만 하면서 살고 싶다. 고도 했지만 나에게 글쓰기란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신이 그토록 글쓰기에 목을 맨 건 글쓰기로서만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던 어느 작가의 말 때문에 마음이 아픈 적이 많았지만 나는 글쓰기로부터 어떤 구원도 얻지 못했다. 어느 땐가 그것을 향한 열정 때문에 괴로웠던 것도 같은데 나는 온 마음이 데어버리기 전에 그 열정을 버렸다 적어도 나는 글쓰기 때문에 괴로워지고 싶진 않았다. 그것으로 나를 먹여 살리려고 생각하는 순간 글쓰기가 외롭고 고통스러워질까봐 지레 짐작 도망가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만큼 보고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떠돌고 싶을 만큼 떠돌면서 사는 동안 그 곁에서 나를 지탱해줄 것이 글쓰기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그것이 언제나 즐거운 것일 수 있기를 그것 앞에서 내가 언제나 웃을 수 있기를 내가 더 자라고 이곳을 떠나고 또 누군가를 만났다가 헤어지고 나이를 먹어 늙어버린 후에도 내 곁에 글쓰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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